독 - 이승우 장편소설
인간의 악을 탐구하는 이승우의 실험적 소설
인간의 내면에 고여 있는 독과 사회에 퍼져 있는 독의 화학작용이
심연의 거대한 악의를 일깨운다!
20년 만에 원제를 되찾은 이승우 장편소설 『독』이 예담에서 재출간됐다. 이 작품은 현재는 폐간된 문학 계간지 《소설과 사상》에 ‘독’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됐고 1995년 『내 안에 또 누가 있나』로 출간됐던 소설이다. 대필작가 임순관의 일기 형식으로 전개되는 『독』은 청년 이승우가 악에 대해 야심차게 파고든 소설로,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악이 나쁜 사회와 조응하여 어떻게 거대한 악의로 사람을 집어삼키는지 서늘하게 보여준다. 일련의 상징적인 사건들과 그로 인한 심리적인 변화 과정이 작가 특유의 필치로 집요하고 면밀하게 이어진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는 악의를 ‘독’으로 표현한다. 임순관은 의학적으로 진단되지는 않지만 내장부터 썩게 만들어 끝내는 죽게 할 독이 자기 내부에 고여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리고 하루하루 들숨을 통해 육체에 축적됐다고 생각한 그 독의 근원이 사실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날숨으로 세상의 대기 속에 토해져 나온 독이 다시 자기 안으로 들어와 부글부글 끓으며 더 많은 독을 증식시킨다는 것을, 인간은 독을 생산하는 거대한 공장이며 세상은 그 독이 유통되는 거대한 시장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독과 세상의 독은 닭과 달걀처럼 그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만큼 긴밀하게 악영향을 주고받는다.
“내가 조명하고자 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달라붙어 있는 악마의 얼굴이었다.”
일기의 주인공인 임순관은 자폐적인 성향의 34세 남자로, 자서전을 자비출판해주는 출판사 ‘시민들’의 대필 작가로 밥벌이를 하는 이외에는 모든 사회적인 교류를 꺼리며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신만의 시간 감각대로 살아간다.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사람들만 골라 죽이고 화살을 남기는 연쇄살인사건, 아버지까지 살해한 사형수 손철희의 자서전 대필 계약, 젊고 부유한 팜 파탈에게 거액을 받고 자신의 시간을 팔아야 하는 수상한 거래, 그리고 신천지설계협의회라는 낯선 단체에서 보내온 화살 세 개가 그런 그의 조용한 일상과 내면에 균열을 일으킨다. 우리는 임순관의 시선대로 그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어떻게 그를 자극하여 연쇄살인에 동참시키는지를 따라가게 된다.
“나의 행위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공범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들의 생각을 실천했다”는 손철희의 주장에 수긍할 만한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밀실로 모여들어 퇴폐적인 환락을 일삼는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과 그런 그들의 타락을 몰래 촬영해 역이용하는 민초희,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임순관을 아파트에서 몰아내려는 이웃들의 지나친 행동 등은 선의와 악의, 정상과 비정상, 관심과 의심, 배려와 간섭, 가해자와 피해자 등 가치 판단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세상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한다.
작가도 이 소설을 처음 출간하면서 “내가 조명하고자 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달라붙어 있는 악마의 얼굴이었다. 그 악마의 얼굴이 인간의 진짜 얼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악마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살고 있긴 하지만 언제나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악마를 키우고 손과 발을 주는 것은 이 세상의 공기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다. 독이 퍼진 공기 속에서는 숨을 쉬는 것이 곧 독을 들이마시는 행위이다. 그런데 또 바꿔 생각하면 숨을 쉬는 그 행위를 통해 우리는 독을 공기 속에 내뿜기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스로 키운 망상 안에서 세상의 속죄양이자 구원자로
변신하는 반영웅의 가짜 혁명 이야기
그러나 작가는 임순관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표면적인 이야기 외에 이를 완전히 뒤집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숨겨놓았다. 임순관의 일기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이지적 관찰자의 시선으로 치밀한 논리를 따라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성향과 행동과 결정들에 대해 그럴듯한 합리화를 끊임없이 시도하는데, 어느 순간 그 집요한 사유가 그의 악의를 감추려는 궤변으로 느껴지고 우리는 그의 일기를 과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진다. 게다가 무엇이든 솔직하게 고백할 수도 있지만 내 마음대로 은폐할 수도 있는 공간이라는 일기의 양면성을 깨닫는다면 소설의 첫 페이지로 황급히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작가는 임순관을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 설정하고 그 아이러니를 정교하게 구축하여 절묘한 줄타기로 소설의 긴장감을 한껏 고조시킨다. 이렇게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 사형수 손철희도, 팜 파탈 민초희도 임순관의 욕망과 환상이 투영된 결과물일 수 있다. “어두운 하늘을 가로질러 세상의 복판에 꽂히며 정신에 충격을 주는 화살”이 되어 세상의 독을 응징하고 정화할 자격을 임순관에게 부여하는 것도 신천지설계협의회라는 비밀 조직이 아니라 임순관 자신일 수 있다. 임순관은 자신의 독으로 세상의 독을 치유하는 속죄양으로 자신을 바쳐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이 되려 하지만, 망상 속에서는 영웅도 반영웅으로, 구원도 가짜 혁명으로 전락한다. 독, 곧 악은 아무것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독과 개인의 악의는 여전히 증식하고 있고, 임순관이 쏜 화살은 어디에도 꽂히지 못했으며, 그의 자리는 언제든 다른 누군가의 이름으로 대체될 수 있다. 『독』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섭다.
▶지성의 언어로 한국 관념소설의 지평을 넓힌 작가 이승우의 모든 것 ‘이승우 컬렉션’◀
1981년 중편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등단한 이후 34년 동안 쉼 없이 집필해온 작가 이승우의 작품들을 모은 ‘이승우 컬렉션’이 예담에서 차례대로 출간된다.
이승우는 신과 인간, 그리고 신화를 넘나들며 인간의 내면과 현실의 이면을 철저하게 파고들어 한국 소설의 형이상학적 폭과 깊이를 더하는 작업을 성실하게 지속해왔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르 클레지오가 이승우를 한국 작가 중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작가로 손꼽을 만큼 이승우의 문학은 이미 세계적으로 그 탁월함을 인정받고 있다.
단단한 지성의 언어로 가장 깊은 곳을 묻는 작가 이승우의 대표작품 컬렉션을 통해 한국 문학의 힘과 가능성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1959년 전남 장흥 출생.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였고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에리직톤의 초상」이 당선되어 등단한 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1993년 「생의 이면」으로 제1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하고, 2002년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로 제15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창작집으로 「구평목 씨의 바퀴벌레」「일식에 대하여」「세상 밖으로」「미궁에 대한 추측」「목련공원」등이, 장편소설로 「에리직톤의 초상」「가시나무 그늘」「따뜻한 비」「황금 가면」「생의 이면」「내 안에 또 누가 있나」「사랑의 전설」「태초에 유혹이 있었다」등이 있다. 「향기로운 세상」과 「아들과 함께 춤을」등 산문집과 장편동화 「가가의 모험」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4월 7일 목요일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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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