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 - 내맘대로 노래 듣기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
요즘처럼 MP3나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노래를 검색하고, 다운받아 들을 수 없었던 시절, 70∼80년대에는 드르륵 여닫는 빗살무늬 나무문이 달린 흑백텔레비전과 함께 커다란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가 집집마다 있었다.
어떤 이는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쉐이코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들으며 라디오 방송국에 보낼 엽서를 쓰고, 어떤 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 작은 홈 두 군데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인 테이프를 넣고 타이밍을 맞춰 주황색 녹음 버튼을 누르기 위해 잔뜩 긴장을 하고, 어떤 이는 쉐이코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에게 보낼 연애편지를 썼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경상북도 영주에서 보낸 저자에게도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는 노래와의 첫 대면이었다.
“까만색 몸체에 멋진 은빛 날개를 편 독수리가 새겨진 쉐이코 카세트는 대문 옆 오빠가 거처하는 방에 있었다. 그때는 라디오까지 붙어 있던 그 쉐이코 카세트가 유행이었다. 안동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가끔 다니러 오시던 할아버지를 졸라, 햇볕이 잘 들던 오빠 방에서 드디어 새로 산 카세트의 포장박스를 뜯던 날은 저절로 탄성이 질러졌다. 마치 하얀 눈을 꽁꽁 뭉쳐서 만든 것만 같은 스티로폼 박스를 벗겨내자 새까만 카세트 몸체에 붙어 있던, 날개를 활짝 편 은빛 독수리가 푸드득 날아올라 내 왼쪽 가슴에 선명하게 박히는 것만 같았다.”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 에서
이 책에는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 외에도 저자의 ‘뛰어난 기억력’에 의해 소환된, 70∼90년대를 떠오르게 하는 구체적인 사물과 장소가 등장한다. 보솜이, 블랙조, ABC동물과자, 마르셀비누, 언더우드, 브렌따노, 제이빔, 미라젤, 후리덤, 동춘서커스단, 코아아트홀, 타워레코드, 종로서적, 호출기, 꽃무늬 요란하던 밍크담요. 한 잔에 백 원이던 잔소주.
이를 기억하고 있는 독자라면, 『독수리표 쉐이코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내 지나온 청춘’을 떠올리며 공감하게 될 것이다.
내맘대로 노래 듣기
저자가 노래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2007년 격월간 『삶이 보이는 창』에 ‘내맘대로 노래 듣기’를 연재하면서였다. 열두 편의 글을 싣는 동안 『삶이 보이는 창』에서 가장 사랑받은 연재 꼭지이기도 했다. 2년 후 연재를 마칠 때, 이 글을 계속 읽고 싶다, 더 많은 노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그래서 저자와 출판사는 아예 단행본으로 작업을 해보자고 의기투합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3년 서른 편의 이야기를 담아 책으로 출간되었다.
음악적 지식이나 대중음악에 대한 세세한 분석이 수반된 글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저자가 ‘내 맘대로’ 들려주는 이 글에는 어떤 힘이 숨어 있는 걸까.
“노래가 내 몸의 뼈가 되고 살이 될 수 있을까. 뼈가 되고 살이 된 그 노래가 영혼의 허기를 달래주는 따듯한 밥이 될 수 있을까. 류인숙의 산문은 고단한 한 시절을 견디게 해준, 그리하여 생의 여울목을 가뿐하게 건너가게 해준 노래의 기억을 파먹고 산 어느 아픈 청춘의 시린 흔적이 아로새겨진 연서이다. 그녀가 오래도록 아껴서 먹었던 노래엔 삶의 애환과 지극한 사연이 숨 쉬고 있다. 그녀의 일용한 양식이 되어준 애틋한 노래가 열어주는 숨의 길을 따라 이젠 우리가 기꺼운 마음으로 나서볼 일이다. 노래가 산이 되고 바다가 되는, 노래가 강이 되고 들판이 되는 이야기의 풍경에 한껏 취해서.”
- 최창근(극작가)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 졸업식도 치르지 못한 채 열아홉 나이에 청량리행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던, 봉제공장 시다로, 카오디오 부품공장에서 일하면서 동생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서른이 넘은 나이에 늦깎이로 대학에 갈 수 있었던 저자의 삶은 나의 이야기이고, 누이의 이야기이고, 소문자 이니셜로 존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70∼80년대를 지나온 아픈 청춘들의 이야기이다.